
이미지 출처: 알라딘
계절을 나눠 갖는 일
여덟 명의 작가가 한 계절씩을 맡아 적었다. 『계절 쓰기』의 출발점은 이 한 문장에 거의 다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사계절을 차례로 통과하며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에게 계절이 배정되는 방식이다. 봄을 받은 사람과 겨울을 받은 사람은 같은 책 안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온도의 문장을 쓰게 된다. 계절이 소재가 아니라 조건으로 주어진 셈이다.
계절은 어떤 글에서든 흔히 등장하는 배경이지만, 그것을 여러 사람이 나눠 갖는 순간 성격이 달라진다. 내게 할당된 것이 여름이라면 나는 여름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 이 질문 앞에서 작가의 이력과 관심사, 평소의 문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필자는 여덟 명이고 계절은 넷이니 한 계절을 두 사람이 나눠 맡는 구성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면 같은 계절을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 비교해 읽는 재미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앤솔러지라는 형식은 자칫 느슨해지기 쉽지만, 계절만큼 분명한 경계를 가진 주제도 드물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누구나 아는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이 여덟 편의 글에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소설가, 번역가, 시인, 그리고 식물분류학자
참여 필자 명단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김연수 소설가, 홍한별 번역가, 김소연 시인,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전의령 인류학자, 윤경희 문학평론가, 김지승 작가, 은유 작가. 소설·시·번역·비평처럼 문학 안쪽에서 오래 작업해 온 이름들 사이에 식물분류학자와 인류학자가 섞여 있다.
이 배치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계절이라는 주제는 문학적 감상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관찰과 기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식물을 분류하는 사람에게 계절은 개화와 결실의 시간표이고, 인류학자에게 계절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모이는지를 규정하는 사회적 리듬이다. 문학 쪽 필자들이 계절을 감각과 기억으로 붙잡는다면, 다른 분야의 필자들은 계절을 자료와 현장으로 붙잡는다. 한 권 안에서 이 두 방향이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놓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번역가와 문학평론가가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 직군 모두 남의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 그런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계절을 쓸 때 어떤 문장이 나오는지는, 이 책을 펼치는 분명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가장 빼어난 산문가'라는 공통분모
출판사는 이들을 두고 저마다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도모해 오면서도 우리 시대 가장 빼어난 산문가로 자리 잡은 이들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방식'과 '산문가'가 함께 놓였다는 데 있다. 본업은 제각각이지만 결과물은 모두 산문이라는 형식으로 수렴한다.
산문은 형식적 제약이 가장 느슨한 글쓰기다. 그래서 오히려 쓰는 사람의 사유 방식이 그대로 노출된다. 시인이 쓴 산문에는 행을 나누지 않아도 시의 호흡이 남고, 연구자가 쓴 산문에는 근거를 확인하려는 습관이 남는다. 여러 사람의 글을 묶은 책이 종종 산만해지는 것과 달리, 『계절 쓰기』는 계절이라는 단일한 축과 산문이라는 단일한 형식을 동시에 걸어두었다. 흩어질 여지를 미리 줄여둔 구성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여덟 명 모두가 이미 자기 독자를 가진 필자라는 점이다. 이런 구성의 책은 필자 한 명이 데려오는 독자층이 서로 겹치지 않을 때 가장 넓게 읽힌다. 소설 독자와 시 독자, 논픽션 독자, 식물과 자연에 관심 있는 독자가 같은 책 앞에서 만나게 되는 구조다.
물결점이라는 이름, 그리고 읽는 속도
펴낸 곳은 동아시아의 문학·예술 브랜드 물결점이다. 2026년 7월 10일에 나왔고 정가는 15,000원. 한여름에 출간된 책이 사계절 전체를 다룬다는 점은 조금 얄궂으면서도 어울린다. 지금 이 계절을 통과하는 중에 다른 계절의 글을 미리 읽어두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 읽기보다 하루에 한 편씩 끊어 읽는 쪽이 어울린다. 필자가 여덟 명이니 글의 결도 여덟 번 바뀌는데, 연속으로 읽으면 그 전환이 피로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당 챕터를 꺼내 읽는 식의 활용도 가능한 구성이다.
제목이 '계절'이 아니라 '계절 쓰기'라는 것도 짚어둘 만하다. 계절 자체가 아니라 계절을 쓰는 행위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문장으로 옮겼는가가 이 책의 진짜 관심사라는 신호로 읽힌다.
누구의 책상에 놓이면 좋을까
산문을 즐겨 읽는 사람, 특히 여러 작가의 문장을 한 권에서 비교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맞는 책이다.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아직 책 한 권을 통째로 읽어보지 못한 작가가 명단에 있다면, 그 작가로 들어가는 입구로 삼기에도 좋다. 여러 필자의 글을 묶은 책의 장점은 부담 없이 첫 문장을 만나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대로 하나의 주제를 끝까지 파고드는 단행본을 기대한다면 결이 다를 수 있다. 이 책은 계절이라는 넓은 우산 아래 여덟 개의 서로 다른 시선을 모아둔 형태이고, 통일된 논지보다는 다양한 감각을 제공하는 쪽에 가깝다. 그 다양함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15,000원으로 여덟 명의 산문을 한 번에 만나는 셈이니 밀도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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